우리 매사냥이 알려지기까지 그 시작은 이러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아름다운 진실의 매듭을 지으려합니다.
내가 매사냥 취재를 나선 것은 10여 년 전의 일이다. 여행담당 기자로서 '자연주의 여행'이라는 주제를 내걸고 자연과 어우러지는 우리 토속을 여행의 소재로 찾고 있었다.
어느 토속 관련 간행물에서 진안에 매사냥이 성행했었다는 내용을 한 장의 봉받이 사진과 함께 만나게 되었다. 수소문해서 사진의 주인공을 찾았으나 오래전에 고인이 된 분이었다.
이웃 동네를 더듬어서 예전에 매사냥 경험이 있는 사람을 찾은 끝에 백운면 운교리 전영태옹(당시 80살 안팎)과 연락이 닿았으나 그 분은 자신은 이미 매사냥에서 손을 뗀 지 오래고 이웃 마을 박찬유씨(당시 40대 중후반)가 바통을 잇고 있을 것이라고 소개했다.
이튿날 바로 박찬유씨 댁을 찾아 방문을 여니 매 한 마리가 매방울을 떨렁거리고 횃대에 앉아 있었다. 나는 박찬유씨를 설득해 생매를 잡는 장면을 재현하고, 이튿날 직접 박씨의 매사냥에 동참했다.
그는 타고난 매사냥꾼이었다. 매를 다루는 방법, 꿩이 숨어있는 장소, 봉받이가 설 자리 등을 잘 짚어내 한 나절에 산토끼 2마리와 꿩 2마리를 거뜬히 잡았다.
박씨를 신문에 소개하고 <그곳에 다녀오면 살맛이 난다>라는 여행서 뒷표지 사진으로 실었다. 미국에 있는 한 교포가 이 사진을 보고 시커멓게 묵은 미국 매를 들고 귀국했다. 미국에서처럼 매사냥을 상업적으로 운영해보겠다는 목적이었다.
이렇게 박찬유씨가 매사냥 재현 공로자로 매스컴의 각광을 받기 시작할 즈음, 이듬해 겨울 전영태옹이 내게 전화를 걸었다. 사실은 자기가 매사냥 원조로서 다시 매사냥을 해보겠다는 것이었다.
그 분은 용모와 언변으로 매스컴을 잘 활용할 줄 알았다. 그리고 연세도 있고 재산도 많은 편이어서 주위 사람들을 매사냥 도우미들로 쉽게 불러 모을 수 있었다. 그리고 매사냥에 관한 온갖 이론을 조리있게 제공하고 사람과 매에 대한 통솔력을 잘 발휘하여 매사냥을 볼품있게 시연해 보였다.
전옹을 취재하러 갈 때마다 늘 한 노인이 전옹의 매사냥 도우미로 따라다녔는데, 알고 보니 항상 그 분이 생매를 받는 일(매사냥에서 가장 어렵고 중요한 일이다)과 매 훈련을 시키는 일을 도맡았다. 그 분이 바로 이 연재기사 1회에서 매받는 그물을 놓고 위장막에 숨어 기다리던 사진의 김용기옹이다.
그 기사 댓글을 단 '용가리(필명)'씨에 따르면 김옹은 3년 전 돌아가셨는데, 용가리씨는 어렸을 적부터 오랫동안 김옹의 매사냥을 따라 다녔다고 한다.
나는 당시 문화재관리국에 인간문화재(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 지정을 신청했다. 문화재관리국은 적잖은 돈을 들여 '매사냥 현장실태 조사'를 하여 보고서를 냈다.
그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전국에 매사냥 경험이 있는 사람이 20여 명 생존하고 있으나 진안 전영태옹이 '유일하게 현재 실행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문화재위원회는 매사냥의 무형문화재 지정을 거부했다. 이유는 첫 번째 매사냥이 한국 수렵문화를 대표하지 않는다, 두 번째 매사냥은 매가 주인공이다, 세 번째 매사냥은 개인놀음이다 등이었다.
그런데 1년 뒤 전라북도 문화재위원회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매사냥을 전북문화재로 지정하고자 하니 자료를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문화재관리국이 위의 이유로 국가문화재지정을 거부했다는 설명과 함께 내가 쓴 매사냥 기사와 매사냥을 소개한 내 책을 보냈다.
얼마 뒤 매사냥은 문화재관리국의 국가문화재지정 거부 이유와 정반대의 이유로 전북문화재로 지정됐고 전영태옹이 매사냥 인간문화재(기능보유자)로 지정됐고 평생 지원금을 받게 됐다. 즉 매사냥은 한국 수렵문화를 대표하고, 사람이 도구인 매를 부리는 주인공이며, 꿩털이꾼 등 20여 명이 동원되는 집단놀이라는 등의 이유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매사냥을 꾸준히 해온 김용기씨에 대해서는 전혀 배려하지 않았다. 문화재위원회 스스로 자료와 실태를 파악하기보다는 전적으로 언론보도를 자료의 전부로 삼은 탓이다.
나는 그때 김용기옹이 매를 받아오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지만 그저 그러려니 생각하고 말았다. 이 점 돌아가신 김옹께 사죄하고자 한다. 김옹은 그 뒤로도 누가 인간문화재로 지정됐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인간문화재를 지정할 때 후계자도 함께 지정한다. 나는 마땅히 '신세대 매사냥꾼'으로 매사냥의 모든 기능을 원활히 갖춘 박찬유씨가 적임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박씨가 후계자로 지정되지 않았다.
매사냥 취재가 끝난 후 한참 뒤 텔레비전에서 어떤 사람이 그 지역(진안이 아닌 다른 지역이다) 매사냥 인간문화재로 지정됐다면서 출연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 프로그램을 보고 매사냥에서 가장 어려운 기술인 생매 받기를 문화재지정 심사에서 점검했는지, 당시 문화재청 무형문화재과 관계자에게 물어봤다. 답은 한국조류보호협회에서 매를 빌려주기도 했다는 것이었다.
몸을 다친 매를 치료해서 자연에 돌려보내지 않고 굶겨서 혹사시키는 사냥매로 쓸 수 있느냐고 물었다. 매는 천연기념물로서 문화재이고 "문화재 이동에 관한 법률이 있다!"고 했다.
나는 '문화재 이동'이란 다친 매를 '죽음의 현장'에 내보내는 게 아니라 도자기나 회화, 조형물 등 무생물 문화재를 전시 등의 목적으로 장소를 옮길 수 있다는 게 아니냐고 묻고 전화를 끊었다.
출처: "매가 산으로 돌아가는 때는 매만 안다", 오마이뉴스, 2006년 01월 15일 수정, 2021년 04월 22일 접속,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04511